박정원이 말하는 박정원

*무대에서 관객을 웃고 울리는 배우들부터 미래의 예비스타까지 서정준 객원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만난 이들을 알아보는 인터뷰 코너 '서정준의 원픽'입니다.
[서정준의 원픽] [인터뷰①]에서 이어집니다.
이제부터 뮤지컬 '테레즈 라캥'의 카미유가 아닌 배우 박정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배우가 되길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자기소개 했을 때처럼, 편지에서나 팬분들, 관객분들 만날 때 '배우님 덕분에 위로받았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너무 행복해요. 사실 그분들 덕분에 저도 위로받고 있거든요. 관객이 있기 때문에 배우들도 존재하는 거라서 저도 늘 감사하고 위로 받는데 그분들도 무대에서 연기하는 저를 보며 그런 위로를 받으신다고 하니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위로'가 언제부턴가 제 연기의 모토가 된 것 같아요.
하지만 반대로 배우로서 느끼는 어렵거나 힘든 순간도 있겠죠.
제가 최근에 '더 픽션'이란 작품하면서 좀 힘들었어요. 무대 위에 서는 게 정말 무서운 순간이 오더라구요. 모든 분들이 느끼시겠지만, 잘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컸어요. 제가 그런 부담을 가질만한 위치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무대를 계속 섰고 공연했던 배우잖아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내가 상대 배우에게 피해를 주면 안된다는 부담감. 돈을 내고 공연보러오신 분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보니 살짝 공황장애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예전부터 약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번에는 무대 위에서 너무 숨막히고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순간이 생기면서 대사도 자꾸 더듬게 됐죠. 보시는 분들은 제 상황을 모르잖아요. 제가 대사를 더듬으면 '아 쟤 또 더듬네'라고 보시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걸 받아들이는 게 배우의 숙명이자 책임감이니까요.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장 무서운 적인 것 같아요.
그러다 어느 날 공연 시작 전에 암전된 무대에 제가 등장해서 깜깜한 객석을 보는데 '누가 시켜서 하는 일 아닌데 왜 그렇게 부담을 가지니?', '더듬든 아니든 잘 즐겨보자' 그런 생각이 들면서 뭔가 한꺼풀 벗겨진 느낌이 들었어요. 첫 대사를 내뱉는 순간 '아 됐다…' 싶었죠. 내가 이거 원해서 하는 일이잖아. 누군가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잖아 싶었어요.
첫 번째가 내가 원해서 하는 일. 그 다음이 그것으로 인해서 관객들이 위로받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순서를 다르게 생각해서 '나는 무대 위에서 배우로서 무조건 관객들에게 위로를 드려야만 해'라는 책임감이 크게 왔던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동료들과 이야기해보면 다들 비슷한 생각이 조금씩 있더라구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났던 순간을 기억하나요?
저는 아직도 기억해요. 제가 원래는 가수가 하고 싶어서 안양예고를 갔어요. 제가 중3때 드라마 '야인시대'의 김두환으로 인기를 끈 배우 안재모나 선글라스 낀 가수 비, 힐리스 타고 나오던 가수 세븐이 인기 있었거든요. 그땐 사실 막연하게 공부 잘해서 공군사관학교 가서 파일럿이 된 다음 항공사를 들어가야지 생각했어요. 그래서 하루 열두 시간씩 공부하며 외고를 가려고 했죠. 더 어릴 땐 운동선수를 꿈꾸기도 했고, 뚜렷하지 않았죠.
그런데 열두 시간 공부하고 집에 가서 TV 보면 너무 재밌는 거에요. 위에 말씀드린 세 분의 공통점이 안양예고 출신이에요. 그래서 거기 가면 나도 저렇게 되나 싶어서 부모님께 노래하겠다, 안양예고 가겠다고 했어요. 부모님이 '그래 해봐라' 하셨죠. 사실 제가 7살 때 유치원에서 재롱잔치 사회를 보는데 울면서 엄마 찾고 그랬던 적이 있거든요(웃음). 어머니께서 그걸 기억해서 제 꿈을 쉽게 보신 거죠.
그렇게 해서 안양예고를 가게 됐어요. 운이 좋았죠(웃음). 1학년 때는 노래만 했는데 2학년 올라가려면 공연을 꼭 해야됐어요. '노래하고 싶은데…' 생각하면서도 결국 하게 됐죠. 당연히 연습은 대충했어요. 그런데 공연날 암전 상황에서 뒤돌아 앉아있는데 온몸이 떨렸어요. 거짓말같은 표현이지만, 온몸의 세포가 느껴지는 순간이었죠. 예민되고 흥분되고 긴장되는 순간. 그 순간 '난 이거 해야겠다' 마음 먹었어요. 물론 그 공연은 망했지만요(웃음).
그래서 연기와 노래 같이 해야겠다 생각하고 뮤지컬로 가게 됐죠. 그게 계기가 돼서 시작했는데 저도 재미있고 남들도 저를 보며 잘한다고 해주시고요. '좀 소질이 있나?' 싶어서 계속하게 됐어요.
만약 나이를 먹거나 어려질 수 있다면 어느 쪽을 고르겠어요.
어려지고 싶어요(웃음). 일단 서른셋이 될줄 몰랐어요. 어릴 때는 '서른즈음에'란 노래도 있고 30대가 되면 뭔가 바뀔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땐 아무렇지 않았어요. 이제서야 '이제 내가 나이먹었구나' 싶죠. 같이 작품하며 만나는 친구들이 20대 중반이면 저랑 나이차이가 엄청나잖아요. 돌이켜보니 제가 그때 만난 형들은 이제 40대에요.
저는 저를 매일 보니까 모르는데 옛날 사진을 보면 정말 주름 하나도 없어요. 어릴 때는 어린 역할 그만하고 싶다. 나이먹고 싶다. 생각했고 주변에선 '할 수 있을 때 해라' 했거든요. 점점 할 수 없는 나이가 되가니까 어려지고 싶네요. 몸도 예전같지 않고요.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찾은 게 그런 거 아닐까요. 젊음은 정말 맞바꿀 수 없어요(웃음).
이젠 학생 역할, 어린 역할 외에도 다양하게 들어오면서 과도기는 조금 지난 것 같아요. 서른즈음에는 '중후한 역을 하고 싶다'. '나도 멋질 수 있는데' 싶었지만, 지금은 그냥 들어오는 걸 열심히 하고 있죠(웃음).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할까요? 아니면 다른 직업을 해보고 싶나요.
저는 어릴 때 연기하며 그게 너무 좋았어요. 식상할 수 있는 말이지만, 여러 사람의 삶을 살수 있는 게 배우의 특권 아닌 특권이잖아요. 그래서 배우가 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막연하게 그렇게 시작했는데 어느정도 경력을 쌓고 뒤를 돌아보니까 박정원이란 사람은 없고 작품 속 캐릭터만 있는 거에요. 박정원과 정말 친했던 사람은 연기하느라 바쁘다고 핑계대다보니 다 떠나가고요.
그래서 제 삶인데 제가 없다고 느껴서 연기를 그만둬야하나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다음 생에도 배우를 또 하고 싶을 것 같아요. 이제는 박정원은 없지만 박정원이 연기하는 카미유가 있고 그걸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이 보여요. 예전에는 박정원이 중요하다 생각했기에 실망했지만, 지금은 카미유를 하고 있는 박정원 역시 박정원이라고 생각하게 돼요. 연기하고 있는 나를 통해 지금의 나를 보게 되는 느낌이에요.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하고 싶어요. 키 크고 잘생기게 태어나면 더 좋고요(웃음).
최근 가장 황당했던 순간이 있나요.
제가 집에 택배를 시켰는데 택배상자가 좀 컸어요. 그런데 그게 문 앞을 딱 가로 막아서 집 안쪽에서 문을 열어도 안 열리는 거에요. 이사온지 얼마 안돼서 이웃사람들도 모를 땐데(웃음). 결국 박스 크기에 비해 내용물이 조금 작은 덕분에 박스를 엄청 구겨서 겨우겨우 열었죠(웃음). 만약 내용물이 상자에 꽉 차있더라면 정말 도리 없이 옆집 사시는 분께 소리쳐야 했을 거에요.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언제일까요.
보통 밤 11시, 12시 정도에요. 뭔가 자유로워지는 시간이라고나 할까요. 하루의 마무리를 하는 시간이 가장 좋아요. 11시가 좋은 이유는 8시가 있기 때문이거든요(웃음). '오늘도 너무 잘했다' 생각하고 11시에 집에 딱 들어가니까요.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바쁜 극장에 있다가 집에 혼자 있을 때 느껴지는 침묵과 적막이 좋을 때가 있어요.
내가 생각하는 배우란 무엇일까요.
저는 사실 뭔가 거창한 게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요. 배우가 나름 남들 앞에 선다고 해서 엄청 막 높이 떠받들여지는 사람도 아니고요. 저는 공연을 통해서 저나 관객도 그렇지만 배역이 위로받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공연으로 만들어지기 전에는 단순히 그냥 글로 적혀있는 이야기잖아요. 삶도 죽음도 아닌 그냥 글인데 카미유의 생각을 내뱉고 행동하고, 그 카미유가 자신을 연기하는 저를 보면서 '내 생각을 잘 전달해줬다'고 느끼면 좋겠어요. 그런 역할을 하고 싶어요.
누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줄 때 선생님이 되는 거고 스스로가 교사라고 해서 교사인 건 아니잖아요. 누가 저를 배우라고 해줬을 때 배우가 되는 거죠. 배우라는 직업은 남들이 나를 만들어주는 그런 느낌이에요. 그래서 자기소개 할 때도 사실 배우 박정원입니다라는 말을 좀 민망해해요.

공연 보러 올 관객들과 팬들에게 마지막 한마디 부탁합니다.
위로라는 말은 너무 써서 그만 써야겠네요(웃음). 사실 공감이란 것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공감이 돼야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잖아요. 모든 공연이 그렇겠지만 '테레즈 라캥'에서도 관객들이 공감할 부분을 찾고 있어요.
제가 카미유를 연기하고 있지만, 그가 가진 속마음에서 뭔가 공감되는 부분을 느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럼 기존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굉장히 거창한 말이지만(웃음), 그러실 수 있으면 좋겠고 저도 그렇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니까 많이 보러와주시면 좋겠어요.